[ 기사위치 배움 그리고 성장의 고통들 ]

삶의여정 3 - 청소년기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FCN FM교육방송 심의보 교육·복지제작국 | 편집제작부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블로그 카카오스토리


청소년기 시절, 고전에서 지혜와 교훈을 얻었다

무실역행의 정신을 세우다(청주공업고등학교) - 1


청소년기 시절, 고전에서 지혜와 교훈을 얻었다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청주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전공과목을 광산과로 선택했는데 광산과의 입학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광산학(Mining Engineering)은 지표면이나 땅속에 묻혀있는 고체 광물과 자원을 분석, 측정하여 그 성질에 적합한 채굴 방법과 어떤 기계를 선택하여 채굴할 것인지에 대한 효율적인 방법을 계획, 연구 및 채굴하는 기술적인 분야다. 광산 채굴업계가 유망산업이던 1970대 이전에는 광산관련 학과는 인기학과였다.


1980년대까지 제천엔 광산관련과목만을 가르치는 아닌 광산공업고등학교가 있었다. 사립이던 한국광산공업고등학교는 1990년에 공립으로 전환돼 1991년에 의림공업고등학교로, 2006년에는 제천산업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광산공업고등학교가 공립으로 전환되고 이름이 바뀌며 슬그머니 사라진 것은 광공업의 사양화가 그 원인이었다. 지금은 전국 어디에도 한때 학생들의 선망이던 광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광산업계는 광업인력 양성기관이 전무한 한국 광업계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현재 광산관련 학문의 연구가 가장 활발한 나라는 호주다. 호주는 세계에서 광물 수출을 가장 활발히 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광산학 분야는 발전 가능성이 크다. 광물자원이 유한성을 가지고 있어 채굴 시 가장 높은 채취율을 끌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광산공학의 전문 기술성은 수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광산업이나 광산학에 관심이 있는 인재들이 호주에 유학을 가야만 하는 세태가 안타깝다.


광산업을 발전시킬 광산학을 공부하고자 청운을 품고 도전한 광산과는 입학 후 1년 만에 폐과 결정이 내려졌다. 학교에선 고육지책으로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나 뜻하지 않게 시대의 조류에 밀려 광산과 마지막 학생들이 되어 버린 나는 진로에 대한 불안에 한동안 마음의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도대체 앞을 분간 할 수 없을 때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는 말을 쓴다. 오리나 되는 짙은 안개 속에 갇혀 있다는 의미겠다. 1리를 4km로 치면 20km나 되는 안개가 끼여 방향과 하늘, 땅을 분간할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 상황일 것인가.


오리무중은 ‘후한서(後漢書)’ 장패전(張覇傳)에 나오는 말이다. 장해(張楷)가 일으킨 ‘오리무’에서 ‘오리무중’이 유래했다. 후한 때의 학자 장패의 아들 장해는 많은 제자를 거느린 명망 있는 학자였다. 그의 명성을 듣고 이름 있는 학자, 환관과 외척 등 세도가들이 모두 그와 가까이하려고 애썼으나 그는 아버지와 함께 세속에 물든 자들을 피해 시골에 숨어 살았다.


생업이 없어 빈곤했던 학자는 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장에 나가 약을 팔아 근근이 생활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그가 사는 화음산을 찾아 들었고 몰려드는 사람들 덕에 공초시(公超市)라는 시장이 생겼다고 한다. 공초시는 장해의 호다.


장해는 학문뿐만 아니라 도술에도 능해 안개를 일으켜 오리 안을 뒤덮을 수도 있었다. 당시 삼리 안을 안개로 뒤덮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배우(裴優)란 이름의 술사가 있었다. 안개를 일으켜 도적질을 하다가 체포된 배우는 장해에게 안개를 피게 하는 술법을 배웠다고 거짓 진술했다. 장해는 이에 연루되어 2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옥중에서 상서(尙書)의 주를 쓰며 학문에 힘썼고 누명을 벗은 뒤 칠십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나는 한동안 장해가 일으킨 오리무에 갇힌 듯 답답했다. 그러다가 문득 오리무를 일으켜 스스로 몸을 감추고 공부에 매진했던 장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를 지도하시던 이규훈 선생님은 광산과 폐과 결정에 청주공업고등하교를 떠나 삼척공전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이종권 선생님이 이규훈 선생님 대신 우리를 맡게 되셨다. 학년이 올라가며 나는 단단하게 몸과 마음이 여물어 갔다. 학교는 집처럼 편안했다. 서정일 교장선생님은 작은 다리를 준공하고 보람의 다리라 명명하여 꿈을 심어주셨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화재로 강당이 모두 타버린 이튿날 눈물을 흘리며 구부러진 역기 봉을 만지던 일이 아프게 떠오른다. 무심천이 범람하여 물살에 뿌리 채 뽑힌 버드나무를 힘들여 정리하던 일도 있었다. 세월이 흐르니 이 모두가 그리움으로 남게 됐다.


FCN FM교육방송 심의보 교육복지제작국 편집제작부



편집제작부  fmebsnews@fmebs.com

<저작권자 © FCN FM교육방송 심의보 교육·복지제작국,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삶의여정4 -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