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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정1 - 어렸을때 어떻게 지냈나?

FCN FM교육방송 심의보 교육·복지제작국 | 편집제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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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면서 기억에 남는 것들은 무엇이 있나? 배움, 그리고 성장의 고통들은?

어렸을때 어떻게 지냈나?


자라면서 기억에 남는 것들은 무엇이 있나? 배움, 그리고 성장의 고통들은?


◑ 배움의 길을 걷다


란도셀과 상고머리(월곡 초등학교)에 대한 추억과 지워지지 않는 마음속 어린시절 기억들


지금은 한국교원대학교 부설 학교로 유명한 월곡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배움의 길로 들어섰다. 학천리가 월곡초등학교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동네였기에 어린 초등학생은 매일 먼 소풍 길을 나서듯 학교에 다녔다. 벌판을 가로질러 얕은 산을 넘고 개울도 건너야 했다.


개울물이 차지 않은 늦은 봄에서 가을까지는 신을 벗어들고 개울을 건널만했지만 살얼음이 언 겨울과 초봄에 맨발을 개울에 담그면 발이 얼어 종아리까지 전기가 오는 듯 아렸다. 바람과 비, 눈과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다녀야했던 힘든 등, 하굣길이었지만 어린 나는 매일을 설레며 타박타박 먼 길을 걸어 다녔다.




일학년 코흘리개가 처음으로 만난 선생님은 양인석 선생님이다. 어려운 큰아버지처럼 보여 바라보기만 해도 머리가 움츠려 드는 선생님은 첫 시간에 자기이름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칠판에 이름을 써보라 말씀하셨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는 손을 들고 나가 또박또박 한자로 이름을 썼다. 놀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선생님의 손길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어렵고 부끄러웠지만 선생님의 칭찬이 너무나 좋았다. 한 학기를 보내고 받은 1등 등수가 적힌 성적표를 어머니는 오랫동안 보관하셨다. 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실 때 업어주던 일도 아직까지 가슴에 따뜻하게 남아있다. 당신이 맡은 어린 1학년 반 아이들을 친 손주처럼 사랑으로 다독여 주신 선생님을 만난 덕에 학교생활이 더욱 즐거웠다.


네덜란드어 ''Ransel''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란도셀은 일본 초등학교의 학생들이 메는 책가방이다. 네모난 건빵 모양의 이 가방을 초등생들이 메는 이유는 물에 빠졌을 때 튜브 대용으로 쓸 수 있고 충돌사고를 당했을 때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기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다 자란 처녀였던 나와 띠 동갑이 넘게 나이 차가 지는 누님은 어린 동생을 유달리 예뻐했다. 누님은 당시 도시 아이들 중에서도 소수나 가질 수 있었던 란도셀을 어렵게 구하여 나에게 메 주었다.



그런데 나는 란도셀 가방이 싫었다. 당시 시골아이들은 검정색 무명보자기에 책을 싸서 둘둘 말아 허리에 단단히 묶어 메고 학교를 다녔다. 책가방조차 귀하던 시절의 책보자기다. 친구들이 모두 책보자기를 허리에 두르고 다녔기 때문에 나도 동네 친구들처럼 보자기에 책을 싸 메고 다니고 싶었던 것이다.


투정거리는 란도셀 가방만이 아니었다. 여름이면 대부분의 친구들은 러닝셔츠와 팬티 바람이 일상복이었다. 그러나 양재학원을 다녀서 옷을 지을 줄 아는 누나는 카라가 달린 셔츠와 반바지를 정성스레 지어 동생에게 입혔다. 러닝셔츠와 팬티가 속옷이어서 셔츠와 바지를 그 위에 입어야하는 것이 맞는 복장이었지만, 어린 나는 친구들과 다른 옷매무새가 영 부끄럽기만 했다. 그게 싫어서 아침마다 겉옷을 입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일을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또 하나 부끄러웠던 것이 상고머리다. 친구들은 모두 머리를 민 까까머리였는데 나는 앞머리를 눈썹에 맞춰 자르고 옆머리와 뒷머리만을 밀어 올려 깎은 상고머리를 했다. 또래 친구와 다른 것이 무조건 마음에 들지 않아 투정을 했던 모든 일이 누나의 사랑이었음을 철이 든 후에야 알게 됐다.


봄, 여름엔 학교 수업을 마치면 미호천으로 내달아 물놀이를 했다. 예방주사를 맞고도 물놀이를 하여 주사를 맞은 곳이 퉁퉁 부어오르는 일도 있었지만 방과 후의 물놀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던 재미난 놀이였다. 지금도 미호천을 지날 때면 옷을 모두 벗어 책보와 함께 둑방 풀섶에 집어 던지고 알궁둥이가 새까맣게 타도록 물놀이를 했던 천진한 어린 마음이 된다.


물놀이에 젖은 머리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수리에 꽂히듯 뜨거운 한 여름 볕에 익어가던 노란 개똥참외의 비리고 심심한 맛과 들깻잎 밭의 고소한 들깻잎 향기도 아직까지 생생하다.


집에 돌아오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당연히 부모님 일을 도왔다. 논과 밭의 잡초를 뽑고 작은 지게에 땔감을 모아 나르기도 했다. 소를 먹이는 것도 우리의 일이었다. 동네 산으로 친구들과 소를 몰고 나가 풀을 뜯기거나 풀을 베어 소에게 먹이는데 겨울에는 말린 풀과 볏짚으로 쇠죽을 쑤어 소에게 먹였다. 소에게 먹을 풀을 낫으로 베다가 손가락에 상처를 입는 일도 흔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물놀이를 한바탕한 뒤 먼 길을 걸어 집에 돌아와 집안일까지 거들었으니 잠이 쏟아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올려 뜨고 꾸벅꾸벅 졸며 숙제를 하다 저도 모르게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면 아버지가 안아서 이불 위에 뉘어 주시곤 했다. 아버지의 품에서 나던 아버지의 땀 냄새가 그립다.


형제들이 아홉이었기에 함께 학교에 다니는 형제가 많았다. 모든 옷과 교과서는 물려받았는데 그래서 손아래 동생은 몇 명의 형이 사용하다 물려준 낡은 옷과 헌책이 싫어 항상 볼이 부어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시골학교로선 드물게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했는데 울긋불긋한 장식이 있는 멋진 유니폼을 입고 으쓱해서 야외활동을 했던 일이 생각난다. 형이 입던 헌 옷을 받아 입는 것도 기쁜 일이었는데 내 몸에 맞는 보이스카우트 유니폼을 입으면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의 선생님들은 어머니 아버지처럼 우리를 돌봐주셨다. 오인자 선생님, 박종세 선생님, 이상옥선생님, 전병주 선생님, 신평호 선생님은 감사가 부족한 은혜로운 스승이시다. 음악을 가르치셨던 이상옥선생님, 동생의 담임선생님이셨지만 나를 특별히 아껴주셨던 김영근 선생님, 교회에서 뵈며 존경했던 권성호 선생님도 큰 가르침을 주셨다. 친구 아버지이셨던 박영순 교감선생님도 가슴에 남아 있는 스승이시다.


1학년 때 두 개 반이었던 월곡 초등학교 친구들은 인근에 서촌 초등학교가 개교되면서 한반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끈끈한 우정이 남다르다. 심지어 중간에 전학을 간 상공이와 재구는 아직도 우리 동창회에 나온다. 동창이라기보다 친형제 같은 친구들과 한반에서 밝고 맑게 어울렸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연기군 봉암의 군부대에서 열린 박람회를 구경을 갔던 일, 공주와 부여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일도 특별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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